신청서기재죄명 체포감금치상, 강요미수
검찰관재정죄명 체포감금치상, 강요미수
의 결 년 월 일 헤이세이22년10월6일
의 결 의 요 지
심 사 신 청 인 고토 토오루
심사신청대리인변호사 후쿠모토 노부야
피 의 자 (1) 고토 케이코
피 의 자 (2) 고토 타카시
피 의 자 (3) 고토 요오코
피 의 자 (4) 아오야기 마사코(구성 고토)
피 의 자 (5) 마츠나가 야스토모
피 의 자 (6) 미야무라 타카시
불기소처분을 한 검찰관
도쿄지방검찰청 검찰관검사 이토 노부유키
상기피의자들에 대한 각 체포감금치상, 강요미수피의사건(도쿄지검 헤이세이21년검제2266호, 2267호, 2268호, 2269호, 2270호, 2271호)에 대해 헤이세이21년 12월 9일 상기 검찰관이 한 각 불기소처분의 당부에 관해 당 검찰심사회는 상기 심사신청인의 신청에 따라 심사를 진행해 다음과 같이 의결한다.
의 결 의 취 지
본건 각 불기소처분은 모두 상당하다.
의 결 의 이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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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체포, 감금죄에 대하여
가 고토 나오미(이하 「나오미)라고 함.)택으로부터 팰리스맨션다몬 607호실까지에 대하여
신청인은 피의사실기재일에 나오미택에서 나오미와 피의자 고토 타카시(이하 「타카시」라고 함.)에게 양쪽 겨드랑이를 잡혀 질질 끌려나가듯이 해서 집에서 나와 웨건차에 실렸다. 차내에서는 양쪽 겨드랑이를 껴 앉히었다. 변소에 가고싶다고 말해도 거부당해, 차내에서 간이변소로 용변을 볼수밖에 없었다. 팰리스맨션다몬앞에 도착하여 607호실에 들어갈 때까지 양쪽 겨드랑이를 잡힌채 끌려가다싶이 해서 연행되어갔다고 말하고있다.
이에 대해 피의자들은 신청인을 억지로 연행해도 말이 안되기 때문에 1시간반에서 2시간정도 가족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마지못해서였지만 신청인이 가는것을 승낙해서 팰리스맨션다몬에로 간것이며 체포도 감금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있다.
검토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신청인은 집에서 끌려나와 집을 나갈 때 구두를 신었는지 어떤지 기억이 없다고 말하고있다. 나오미택에서 웨건차까지의 거리는 근 10미터로 이 사이를 끌려가다싶이 해서 맨발과 같은 상태에서 걸었다면 당연히 기억으로 남을것이라고 보는데 기억이 없다는것은 구두를 신은것으로 생각할수 있다. 그렇다면 동행을 거부해 끌려가서 라고 하는 주장에는 의문이 있다.
나오미택은 한적한 주택가에 있고 공도에서 근 10미터의 사도를 안으로 들어간 막다른 골목의 맞은 편에 있어 사도의 양편에는 고토택이외에 3호의 주택이 있다. 공도에 나가면 공도에 면한 집들이 늘어서 있다. 나오미택을 나간 시간은 오후 9시전후경이였기 때문에 신청인이 큰소리를 내여 구조를 구하는것은 용이한 일이였는데 하지 않고있다. 웨건차로 대기하고있던 A 및 나오미택에 있던 B도 신청인은 보통으로 혼자서 걸어와서 차를 타고 하차한후도 같았다고 말하고있다.
차내에서는 양쪽 겨드랑이를 껴 앉혀졌다 라고 하는 점은 피의자 등이 그런 인식은 없다고 말하고있는것이나 웨건차의 승차인원을 생각한다면 한가운데에 누군가가 앉지 않으면 전원이 앉을수 없다는 물리적인 사정이 있은것으로 생각한다.
간이변소는 나오미가 자주 변소를 사용하기 때문에 상비하고있은것으로 간이변소를 사용하는것을 신청인은 거절하지는 않았고 니이가타에는 지금까지도 논스톱으로 갔다왔고, 이때 처음으로 논스톱으로 간것은 아니라는것, 늦은 시간이라는데로부터 한시바삐 도착하고싶다는 피의자의 말도 허위이라고 단정할수는 없다.
웨건차가 팰리스맨션다몬에 도착한것은 오전 2시반전후라는 한적한 시간대이며 신청인이 큰소리를 내여 구원해줄것을 요구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변을 알게 된다고 볼수 있는데 신청인은 구원을 구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나 팰리스맨션다몬 607호실에 대하여
신청인은 현관문의 안으로부터도 열리지 않도록 자물쇠를 채울수 있는 장치가 갖추어져 있고 창문은 모두 스토퍼로 고정되어있어 열리지 않게 되어있었다. 또 가족이 감시하고있었기에 도망갈수가 없었다고 말하고있다.
피의자 등은 현관문의 열쇠나 창문의 스토퍼는 보통의 것이며 특별한 세공을 한바는 없다. 가족이 함께 생활하고있었을뿐이고 감시를 한바는 없다고 말하고있다.
검토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 맨션에서는 헤이세이7년 9월 12일부터 나오미가 사망하는 헤이세이9년 6월 22일까지 생활하고있었다. 신청인의 공술조서에는 「창문이 안으로부터 열리지 않는 상태였기에 현관도 안에서 열수 없는 열쇠가 붙어있는가 라고 생각했다.」고 말하고있으며 현관의 열쇠의 상태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보지 않고있다. 단순한 추측에 의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맨션에서 신청인과 함께 생활하고있던것은 나오미, 피의자 고토 케이코(이하 「케이코」라고 함.), 피의자 고토 요오코(이하 「요오코」라고 함.), 피의자 아오야기 마사코(이하 「마사코」라고 함.)이며 타카시는 한달에 수회 와있던 정도이다.
요오코는 헤이세이8년 1월에 컨디션을 무너뜨려 맨션근처의 친가에서 생활하며 아르바이트의 노동에 종사하고있었다. 나오미는 헤이세이8년 3월에 심장병으로 쓰러져 입원한 이후, 퇴원한 다음에는 이 맨션에 되돌아오지 않고 도쿄의 친가로 돌아가있다. 케이코는 헤이세이9년 3월, 나오미의 입원과 동시에 간병을 위해 귀향했다(그 이전의 헤이세이8년 3월이후 나오미의 간병 등으로 부재로 되는 일이 많았다.). 요오코는 가끔 와있었으나 헤이세이8년 3월이후는 신청인과 마사코만이라는 상태가 많았다. 이에 대해서는 신청인자신도 인정하고있다.
신청인은 수족을 묶이워있던것은 아니고 행동은 자유였다는것, 신청인의 신장은 182센치미터, 체중 약 65에서 70킬로그램전후이며 이에 대해 케이코는 신장 148센치미터,체중 36킬로그램, 타카시는 신장 173센치미터, 체중 63킬로그램, 요오코는 신장 158센치미터, 체중 50킬로그램, 마사코는 153센치미터, 체중 39킬로그램이다. 3명의 여성과 비교해서 신청인이 체력적으로 압도적으로 뛰여나며 진실로 탈출할 의사가 있으면 곤난한것은 아니다. 여성들은 식료품 등의 쇼핑 등도 있어 상시 방안에 있는것은 아니며 방에 있어도 청소나 세탁 등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틈을 타서 탈출하는것도 곤난하다고는 생각할수 없다.
다 팰리스맨션다몬에서 오기구보플레이스맨션에로의 이동에 대하여
신청인은 팰리스맨션다몬에서 오기구보플레이스맨션에로의 이동시에 피의자로부터 유형력의 행사는 없었으나 주위를 둘러싸여 도망칠수가 없었다고 말하고있으며 피의자들은 이를 부정하고있다.
검토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나오미와 최후의 대면을 하기 위해 팰리스맨션다몬을 나갈 때 신청인은 스스로가 몸치장을 하여 스스로가 자동차를 탄것, 팰리스맨션다몬에로 되돌아갈 생각으로 있었기에 지갑, 자동차운전면허증을 두고왔다고 말하고있는것,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아버지와의 최후의 이별의 날에 도망간다는 생각을 가지고있었다는것에는 의문이 있다.
라 오기구보플레이스맨션605호실에 대하여
신청인은 605호실의 현관문은 안으로부터 열수 없는 특수한 열쇠가 설치되어있어 피의자 등으로부터 감시당하고있었기에 도망갈수 없었다고 말하고있다.
이에 대해 피의자들은 현관의 문이나 창문은 보통의 열쇠로 그 어떤 세공은 하지 않고있으며 감시한적도 없다고 부정한다.
검토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신청인의 공술조서에는 「변소로 갔을 때에 가족의 틈을 타서 커튼을 거두어 현관을 보니 번호가 붙은 열쇠가 보인것같았다.」라고 말하고있으며 현관의 열쇠의 상태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확인하지 않고있어 추측에 의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맨션에는 9월 22일부터 12월말까지의 기간 살고있었고 신청인과 함께 살고있던 가족은 케이코, 타카시, 요오코, 마사코인데 케이코는 처음 1개월간은 장의 등의 뒤처리 등으로 친가에 있었다. 타카시는 낮시간은 노동으로 부재이고 또 사이타마의 자택에서의 생활이 절반의 비율이였다.
낮시간,타카시가 부재이라는것, 3명의 여성중 쇼핑 등으로 누군가가 외출하면 남은 여성은 2명뿐이라는것, 신청인은 방안을 자유로이 움직일수 있었다는것, 이런 사실들을 고려한다면 이것으로 감금되어있었다고 할수 있는지 의문이다.
마 오기구보플레이스맨션에서 오기구보플라워홈804호실에로의 이동에 대하여
신청인은 피의자로부터 유형력의 행사는 없었지만 피의자나 낯선 남성에게 감시당하고있어 도망갈수가 없었다고 말하고있다.
피의자들은 신청인은 오기구보플라워홈에 이사하는것을 승낙하고있었다. 타카시의 우인 3명이 왔으나 통일교회로부터의 탈환방지를 위해 도움을 받은것이며 도주방지를 위해서가 아니다. 오기구보플라워홈에로의 이동은 자동차를 사용하였으나 오기구보플라워홈에서 떨어진곳에 주차를 하고 거기서 걸었다. 신청인을 둘러싸듯이 해서 걸은 일은 없고 가족이 보통으로 걸어서 맨션에 들어간것 같다. 도로에는 통행인도 있어 신청인은 도망가려면 도망갈수 있었으나 신청인에게 도망가려는 거동은 없고 통행인에게 구원을 구하려고 행동을 취한것도 없다고 말하고있다.
검토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사는 케이코, 타카시, 요오코, 마사코 이외에 남성 3명이 있었으나 신청인을 묶는 등으로 신체를 구속하지 않는 한 가령 가족 4명이 둘러쌌다고 해도 시중에서 도주를 방지하는것은 곤난하다. 남성은 맨션의 앞에 있어 신청인의 곁에 있지는 않았다.
바 오기구보플라워홈804호실에 대하여
신청인은 현관문의 손잡이부분에는 열쇠가 잠그어져 그 열쇠를 연결하는 형태로 맹꽁이자물쇠가 설치되어있어 안에서 열수는 없었다. 또 피의자 등에게 감시당하고있어 도망갈수 없었다. 헤이세이13년 2월의 1개월간 밖으로 나가려고 격렬하게 행동했으나 피의자들에게 실력으로 저지당했다고 말하고있다. 피의자들도 현관문의 체인자물쇠에 그 길이를 짧게 하기 위해 맹꽁이자물쇠를 잠그어있었던것, 창문의 크레센트를 열쇠를 잠그어놓을수 있는것으로 바꾼것, 현관과 리빙의 사이의 문에 열쇠를 잠그어놓을수 있는 손잡이로 바꾼것을 인정하고있다.
맹꽁이자물쇠는 입주전에 설치하여, 떼어낸 시기는 명백하지 않으나 늦어도 헤이세이10년 5월의 골든 위크전이다. 설치한 이유는 통일교회의 신자가 부모 등과 함께있는 신자를 탈환하기 위해 체인커터 등으로 도아체인을 절단하는 등으로 집안에 들어와 신자를 탈환한다는것을 듣고있었기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체인을 짧게 한것이다. 지금까지 살고있던 맨션에 맹꽁이자물쇠를 설치하지 않았는데 설치한것은 탈환하는 신자의 주거를 찾아내는 방법으로서 목사 등을 미행한다는것인데 오기구보플레이스맨션에서는 가족이외는 출입하지 않고있던것, 오기구보플라워홈은 통일교회 스기나미교회에서 도보로 5분이라는 가까운 장소에 있으며 피의자 미야무라를 미행하여 이 맨션을 찾아내는것은 용이하며 탈환의 위험성이 높았기에 설치한것이다.
현관과 리빙의 문의 손잡이를 열쇠가 잠그어지는것으로 바꾼것은 헤이세이12년말부터 헤이세이13년 2월경까지이다. 이것은 타카시가 노동에 집중하기 위해 개실로서 사용하기 위해서였고 퇴직한 후는 원래의 손잡이로 바꾸었다고 말하고있다.
헤이세이 13년 2월의 소동은 감금에 항의한다는것은 아니라 그 무렵 신청인이 너무나도 진지하지 않은 태도였기에 말을 건네지 않도록 하고있던 일이 있다. 그래서 신청인이 안절부절못하게 되여 큰소리를 내거나 쇼지,후수마(*번역자 주-일본식 가옥의 문들) 등을 부스며 난폭하게 굴었던것이다. 그때 근처사람들에게 페를 끼치게 된다고 제지했으나 따르지 않아서 방석이나 타월로 입을 막은적은 있다. 신청인이 바깥에 나가고싶다고 한적은 없고 현관에 가려고 한적도 없다. 헤이세이16년경에는 요오코와 마사코의 2명으로 신청인의 손을 잡아당겨 힘으로 바깥에로 내려고 한 일이 몇번이나 있었으나 신청인이 완고하게 앉아버티여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나 신청인을 바깥에 내려고 했으나 방안에 틀어박혀 바깥에 나가려고 하지 않아 신청인과 어떻게 접하면 좋을지 고민하고있었다고 말하고있다.
검토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탈환방지를 위해서라는 피의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현실로 통일교회의 신자가 목사를 미행해 주거를 알아내고 신자를 탈환하기 위해 도아체인자물쇠를 파괴해 주거에 침입했다는 사건이 있은데로부터 피의자의 주장은 부당한것으로 부정할수는 없다.
신청서에는 누가 감금당하고있는지 알수 없으면 구출수단을 강구할수가 없다고 씌어있으나 피의자로서는 통일교회의 조직을 생각한다면 누가 살고있는가를 조사해내는것은 곤난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이해할수 없는것은 아니다.
자물쇠가 잠그어지는 손잡이로 바꾼것도, 타카시의 퇴직시기와도 합치되어있어 허위라고는 말할수 없다.
이 맨션에 헤이세이9년 12월말부터 신청인이 쫓겨난 헤이세이20년 2월 10일까지 함께 살고있던 자는 케이코, 타카시, 요오코, 마사코의 4명인데 요오코는 헤이세이10년의 봄경으로부터 헤이세이11년 년말까지 컨디션이 무너져서 자택에 돌아갔고 맨션에는 주에 2,3일의 빈도로 다니고있었다. 헤이세이12년 3월에는 병으로 3주일간 입원해 동년 5월부터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기에 헤이세이15년말까지는 맨션에는 가끔 가는 정도이며 헤이세이16년 2월경부터는 줄곧 동거하고있었다. 타카시는 일을 헤이세이13년 1월로 그만두고 헤이세이16년 3월에 취직할 때까지는 함께 생활하고있었다. 그러나 1주일간에 한번이상은 자택에 돌아가 있었고 맨션에 있던 날이라도 도서관 등에 다녀 부재로 된 때도 있었다. 헤이세이16년 3월에 일을 하게 된 때부터는 1,2년사이는 맨션에 전혀 가지 않고있으며 그간 신청인과는 일체 만나지 않고있다. 따라서 케이코와 마사코의 3명만의 생활이 대부분이며 한명이 쇼핑 등으로 외출하면 방에는 신청인과 두명만으로 된다. 케이코는 내과, 정형외과, 치과 등의 병원을 다니며 마사코도 통원을 하거나 스포츠클럽을 다니고있던데로부터 2명만이라는 기회는 적지는 않다.
맨션의 점검 등으로 수리업자 등이 방에 들어온적도 있다. 에아컨의 설치업자, 급탕관교환업자, 배수관청소업자, 외벽공사 등의 다수의 업자가 출입 등을 하고있었으나 신청인은 이런 사람들에게 구원을 구하거나 그런 때에 탈출하려고 한 바도 없다.
신청인은 업자가 피의자와 내통하고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구원을 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외곬으로만 생각하던것이고 한번도 행동하지 않고있는것을 생각한다면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고있었는지 의문이다.
헤이세이13년 2월의 행동을 항의행동이라고 말한다면 왜 이 1개월간만 행한것인가, 왜 타카시가 있을 때만 행한것인가, 보다 효과적인 여성만이 있을 때에 행하지 않았던가,모두가 잠들어 고요해졌을 때부터 행하지 않았던것은 어째서인가,또 탈출할 의사가 있다면 자기가 지금 있는 장소는 어디인지를 아는것은 중요한 일인데 신청인은 맨션을 쫓겨나서 처음으로 알았다고 말하고있다. 조사할 생각이 있다면 배포된 우편물이나 신문의 영수증, 전기의 사용량의 통지서 등으로 용이하게 알아볼수 있는것이며 조사하려고 한 형적은 기록상 인정할수 없다.
헤이세이16년, 17년, 18년의 4월에 단식을 행한것은 사실이지만 피의자는 단식은 통일교회의 행동의 하나이고 일반적인 말로 바꾼다면 신불에게 발원을 하는것과 같은것이라고 말하고 1번째의 단식을 행하는데 이르게 된 이유는 명백하지 않으나 신청인의 트레이닝을 하고있는 구령이 시끄럽다고 요오코가 주의한것으로부터 말싸움이 일어나 그때부터 단식을 시작했다, 2번째는 한글어의 교재의 요구를 거부당한것으로부터, 3번째는 노트를 요구해서 거부당해 각각 시작했으며 감금에 항의해서라고 하는것은 아니였다고 하는 피의자의 주장은 이해할수 있다.
신청인은 통일교회의 가르침으로서 가족에 가르침을 널리 알려 손을 뻗쳐가는 대상이라는것이나 타카시, 요오코, 마사코가 교조를 배반하고있고 당연히 천벌을 받게 된다는 생각으로 가족에게 오해를 풀고 구원하고싶다는 마음이 있었다고 말하고있으며 그를 위해 머물러있었던것으로 생각할수 있다.
체포, 감금에 대해서 피의자 마츠나가 및 동 미야무라가 관여했다고 하는 증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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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체포감금치상죄
신청인은 체포,감금에 의해 전신근력저하, 페용성근위축, 영양실조의 상해를 입었다. 1번째의 단식때는 문제는 없었으나 2번째의 단식후,
약 7개월간은 적은 미음과 죽밖에 주지 않고 그후 보통식사로 되돌아갔으나 3번째의 단식후, 약 70일간, 미음과 포카리스엣토밖에
주지 않았으며 그후도 허술한 식사가 나와있었다고 주장한다.
피의자는 2번째 단식수료직후의 신청인의 체중은 45킬로그램이였다. 단식기간이 길면 길수록 보통식사로 되돌아갈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며
식사는 영양밸런스를 고려해서 만들고있었다고 말하고있다. 통일교회의 홈페지나 선전삐라로 신청인의 사진을 보았으나 신청인이 목용탕을
출입할 때에 팬츠차림으로 출입하고있는 모습을 보았으나 그렇게 여위지는 않고있었다고 말하고있다.
검토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입원한 일심병원의 내과병력요약에는 신청인의 체중은 39.2킬로그램으로 되어있으나 동 병원의 의사작성의 진단서에는 「탈수가 개선했다고
보아지는 입원후 5일째라도 체중은 52.1킬로그램」이라고 한다. 영양관리계획서의 입원시 영양상태에 관한 리스크란에는 체중 38킬로그램이라는
기재가 53킬로그램이라고 정정되어있다.
일심병원이 작성한 진료록 등을 검사한 대학병원 의사의 보고에 따르면 2월 11일에 체중이 39.2킬로그램, 2월 17일이 52.1킬로그램,
2월 24일이 51.1킬로그램, 2월 27일이 53킬로그램으로 되어있으나 2월11일부터 6일후에 12.9킬로그램이나 증가한다는것은
생각할수 없으며 체중치가 틀리고있다고 판단하고있다. 또 일심병원병원에서 체중측정에 입회한 간호사는 체중을 측정할 때 체중계에 올라탄
후,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대준채로 측정했다고 말하고있는것으로 39.2킬로그램이라고 한 측정결과에는 의문이 있다. 간호기초정보에서는
입원시진단이 「영양실조」라고 기재되어 신장의 기재가 있는데도 영양실조에 중요한 정보인 체중란의 기재는 공란으로 되어있는것도 불가해이다.
영양실조의 점에 대해 도쿄경찰병원의 관리영양사에 따르면 고토일가의 식사는 필요칼로리로서는 부족하지만 기초대사가 현저히 저하되어있다고 보아지므로 외출하지 않고 운동량이 적었다는것 등으로 소비칼로리가 통상보다 적었다고 한다면 즉시로 건강에 해로울 정도의 칼로리부족이였다고는 생각할수 없다. 혈액검사의 결과를 보는한 심각한 영양불량상태였다고는 생각할수 없다고 말하고있다.
타카시, 요오코는 헤이세이7년 1월에 결혼했다. 부부는 그 8개월후부터 신청인의 생활로 따로따로 생활하는 일이 많아 신혼생활다운
생활을 할수가 없었다.
마사코는 29세부터 41세까지 신청인과 함께 생활해왔으나 우인과 노는것도, 노동도 연애도 할수 없어 매우 오래동안 괴로운 기간이였다고
말하고있으나 우리들의 모든것을 건 12년간에 후회는 없다고도 말하고있다.
케이코는 함께 생활하고있었던 때에 신청인이 사용하던 물품을 자택에 가지고 돌아가서, 그 물품을 볼 때마다 신청인을 추억한다.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있을까, 제때에 밥을 먹고있을까 라는 걱정으로 못견딘다. 귀중한 아들이 자기자신의 인생을 소중히 해서 오로지 행복하게 살아주면 한다고 어머니로서 바라고있다고 말하고있다.
이와 같이 신청인을 두고 중요한, 소중한 가족으로 생각하고있는 피의자들이 신청인에 대해 상해를 입혔다고 하는것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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