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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자U씨의 체험담
안녕하세요 저의 체험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7저는 자연이 풍부한 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지역특성상 겸업농가가 많고 평균적인 가정이 많았습니다. 가족은 부모와 할머니 나를 포함해서
4인가족이었습니다. 아무런 불편없이 성장하여 친구도 많고 체육도 좋아했었습니다. 그러한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곁을 떠나
기독교계 단과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1984년의 일이었습니다. 기숙사에 들어가 공부와 써클활동에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취직활동이 시작된 2학년 가을 은퇴시합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 노력한 시간과 결과는 정비례한다는 경험을 쌓아
온 나로서는 그 문제는 갑자기 찾아 온 재난과 같은 것으로 인생의 첫 좌절이었습니다. 다른 팀동료들은 하나 둘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기분전환을 해 갔습니다만, 나만은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용서하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책을 읽거나 선배들에게 물어 보기도
했습니다만, 마음이 편하지 못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고 고민만 하는 자신이 싫어졌습니다. 그 때 전에 앙케이트에 대답하고
받아두었던 팜플레트가 학생수첩에 끼워져 있는 것이 생각나 꺼내어 전화를 걸었습니다. 거기는 텔레비젼 센타였습니다.2) 텔레비젼
센타를 다니기 시작하고 취직이 정해지고 쿠라하라강사의 타락론에 대단히 감동하여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집 가까운 곳에 취직하여 직장에 다니며 틈이 생기는데로 답례로 나가고 헌신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에게
직장을 그만 두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고 9개월동안 밀고 당기기를 하여 마지막에는 아버지가 나무를 베는데 쓰는 낫을 가져와
목에 대고 그래도 가겠는가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만 나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부모님이 알아주지 않아도 틀림없이 아시는
날이 오리라고 믿고 하나님 참부모님3) 하늘을 슬프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결심은 더욱 굳어 갔습니다. 1986년에 헌신하여
전도기동대 마이크로4)21주, 멕콜5)와 수개월로부터 수년단위로 이동했었습니다. 휴일은 한달에 일일 아침에는 탕감조건을6) 위해
일찍 일어나 하루종일 경제할동을 쉬지 않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상천국실현을 위한 섭리를 위해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라는
책임감이 있어 뜨겁게 달아 오른 매일을 보냈습니다. 가끔 형제자매가 한사람씩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였습니다만,
헌금문제로 그만 둔 아담에바였다, 반대목사에 걸려들었다는 이유였기 때문에 사단에 요건을 빼았기지 않도록 더욱 신앙에 정진했습니다.
그러던 중1992년 헌신해 7년째 한국 서울에서 치루어진, 야마사끼히로꼬씨,사꾸라다준꼬씨도 함께였던 3만쌍 합동결혼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통일교회의 교리로서의 최고의 축복과 희망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나의 주체자는7) 같은 나이로 자영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나는 124쌍으로8) 참부모님의 양복을 짓기도 하고 집에 놀러와 식사도 하는 집안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주 신앙적인
집안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합동결혼식이 끝나고 다시 일본에 돌아 왔습니다. 그때까지는 일본에서의 섭리를 추진하는 경재할동이었습니다만,
이번에는 한국에 건너가기 위한 생활비등의 체제비용을 벌기 위해 체육시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친정에 도움도 청했습니다. 헌신해서 4년쯤 지났을 쯤 할머니와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남았습니다. 어머니는 그사람이
일본인이면 좋은데, 고생할 것이라며 걱정했었습니다. 집에 올 때마다 옆에 있는 이불안에서 울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걱정하는 마음은 나에게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뭘 말해도 듣지 않는 딸을 포기했는지 돈을 챙겨주어 나는 한국에 건너가는 마지막
그룹과 함께 축복후 반년만에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에서는 수련원에 모여 신문배달의 지역등이 정해질 때까지 수주간을 보냈습니다.
또 주체자가 찾아 오기도 하고 시집에 인사를 갈 일정등을 정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을 찾아 뵌 날에 갑자기 병원에 안내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멕콜에 소속되어 있었을때 교통사고를 당해 허리에 통증을 걱정해서 였습니다만 대뜸 진단서를 받아 일본에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 어머니한테서 받은 돈으로 겨우 한국에 왔는데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한국간부에게는 상담을
못 하고 영능력가가 6500쌍의 한일이었기에 상담하였더니, 처음이 중요하니, 하라는대로 하는 것이 좋고, 가정부로부터도 반년의
성별기간이 있다하여, 3주만에 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갑자기 돌아온 나를 본 어머니는 놀라워 했습니다만, 심상치 않은 표정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잘 못하면 축복이 깨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어 1개월 후에 다시 주체자를
찾아 갔습니다. 거기서 서로 사전을 찾아 가며 말을 나눴습니다. 주체자의 결론은 통일교회의 교리는 잘 못 된 것이며 자신은 통일교를
포기했고 축복도 없었던 일로 하려 하는데 한 사람이라도 구출하고 싶으니 함께 통일교를 그만두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왜 교리가
잘 못 되었는를 설명하기 시작하였는데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열심히 걸어 온 나의 신앙에 처음으로
작은 금이 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부모와 상담한 결과 거짓탈퇴를 하여 다시 그 주체자를 전도하라는 목표가 주어졌습니다.
한국에서 돌아와서는 주체자의 형님이 사는 치바에 간다고 하기도 하고, 한국에 간다기에 돈을 주었던 어머니, 또다시 남편이 오기로
되었다고 하는 나,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의 신앙과 축복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나에게는 어머니의 고민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체자와 살기 시작한 뒤 두달만에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할머니,아버지의 3년째 제사가 끊나 조금은
편하게 지낼 수 있을까 했던 때였는데, 아버지와 할머니의 간병, 그리고 친척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온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를 전도해서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그 자체가 잘 못 된 일인지 모르고, 주체자에게는 거짓으로 탈회한다고 했지만, 어머니에게도 거짓이라도
그렇게 했으면 이런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내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생각, 한편으로는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등으로
감정이 뒤엉켜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것을 희생하며 신앙을 위해 노력해온 결과는 기대와는 반대로 비참한 상황이어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가조차 생각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49제 그리고 친척들과 인사하고 상담한 결과 통일교를 탈퇴하면 결혼을 인정하나 집에
돌아와 부모의 제사를 지킬것을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집으로 돌아 오는 것에 대찬성이었던 주체자였으나 일본어를 모르고
농촌의 폐쇄적인 분위기와 차별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졌습니다.나는 기분전환을 위해 여러가지로 생각도 해보고 격려도 했습니다만, 물건들을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부서진 것은 쓰레기통, 라디오 ,의자, 텔레비젼등 수없이 던저 부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던졌습니다. 처음에는
물건을 부수는 게 수개월에 한번이었던 것이 아이가 태어나 아이를 돌보는데 시간이 길어지자 그 기간은 점점 짧아지고 더욱 심해졌습니다.
때리고 차고 하는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미안하다고 했기 때문에 참았습니다만 점점 심해지고 반복되어 분위기가
험악해져 아이를 안고 집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뭏든 통일교에 가서 상담하고 싶은 마음으로 영적부모에게 상담하러 가까운
교회에 갔습니다. 지금의 주체자와 헤어진다면 그후에 돌아오라는 말을 듣고 축복을 지키기 위해 희생해온 나에게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도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나의 신앙이 약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영적부모와 상담하고 모르게 원리강론을
읽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때는 싸움이 더 거칠어 져 원리강론을 읽는 것이 무서워 졌습니다. 주체자로부터 내가 나쁘니까 습관부터 고쳐야야한다는
말을 들어 오면서도 축복을 지키기 위해 인내하면서 5/6년 생활하던 중 두번째 아이가 태어 났습니다. 남자아이였는데 주체자도 기뻐했습니다.
이것을 기회로해서 가정을 새롭게 하려 했는지 나에게 가까운 크리스토교회에 갈 것을 권했습니다. 그때까지 인내해온 나에게 전환기가
찾아왔습니다. 통일교인이었다는 이야기를 목사에게 이야기하자 통일교문제를 잘 아는 목사를 소개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반대목사였습니다.
반대목사를 만난다는 것이 발이 떨릴만큼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가출 거친싸움으로 심신이 피로해 있었습니다. 아이들도
불안해하는 생활이 지속되어 있었기에 아무것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주체자도 불안정한 일과 촌에서는 그런 일마저 없어질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때문에 이사를 하였는데 나에게는 통일교를 정리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직장을 전전하며 결국은 주체자가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던 목사가 된다며 공부하고 싶다하여 동의했습니다. 그 뒤 2년반만에 주체자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두고 협의 할 수 있었습니다. 축복을 받고11년만의 일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인드콘트롤을 이해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겨우 이해했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피해자로부터 가해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괴로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용서 해준다해도 자신은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지내습니다. 이럴 바에 아무것도
모른 채 교회에 있었것이 나았는 것 아닌가 왜 이런 주체자를 만났을까라며 어둡고 긴 터널을 쉬지도 못하고 계속 걷고 있었습니다.
또 주체자와의 관계도 DV라는 것을 알고 관련서적을 닥치는대로 읽고 NPO단체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 듯이
자신의 생각을 책을 통해서 말로 표현하고 카운셀링을 받음으로 해서 마음을 정리하고 탈회자를9)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통해
자신을 돌아 보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마지막은 푸라쉬백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목사의 도움이 있어 무사히 이겨낼수 있었습니다. 나는
리하비리가 끝날 즈음 다시 주체자로부터 목사의 꿈을 접고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 통일교문제를 정리하여 돌아갈 이유가
없는 지금 생각하면 이전과 같은 DV를 받으면 나는 틀림없이 자신을 지키기위해 힘으로는 이길수 없기에 뭔가 흉기로 저항했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즉 박미유끼씨와10) 같은 사건을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은 박씨의 문제만이 아니라 조건만 맞으면 자신도
같은 일을 저지를 거라고 생각되어 마음이 아픕니다. 이것이 축복이 안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같은 상황아래서 괴로움과
고민을 하는 자매들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박씨를 위해서 뭔가 할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당시
나에게는 뭔가 문제가 생기면 칼을 들고 나왔을 거라는 것을 DV의 카운셀라에게 고백할 수 가 있었습니다. 기분을 가라 앉히고 주체자가
집에 돌아올 날이 되었습니다. 주체자가 집에 왔을 때 앞으로 잘 될 수가 없고 아이들에게도 그런 아빠는 필요없다는 주위의 말에
용기를 얻어 이혼을 결심하고 집을 나왔습니다. 통일교 문제를 잘 아는 변호사를 찾아갔습니다. 주체자는 한번도 재판소에 오는 일이
없어 일방적으로 이혼이 결정되었습니다. 헌신한 지 26년 만의 일입니다. 잃어버린 날을 회복할 수 없다는 괴로움, 마인드콘트롤이라는
긴 터널을 나와 자신의 다리로 일어 설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함을 느끼고 있던 나였지만 지금은 조금은 회복되어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보내고 있습니다. 통일교문제를 다루는 목사님 변호사님 지원자 여러분 탈회자 여러분 그리고 아직 만나지는 못 했지만 브로그를 통해
알게 된 분들의 도움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구출되기를 희망합니다.
1)한국인남성통일교신자와 일본인여성통일교신자부부의 호칭.
2)통일교라는 것을 숨기고 비데오등을 보여주면서 전도하는 시설.
3)문선명교주에대한 신자들의 호칭.
4)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장사를 하는등의 경제활동의 약칭.
5)통일교가 운영하는 회사.
6)죄를 갚기위해 해야 하는 헌금.
7)합동결혼에 있어 신부로부터의 신랑에 대한 호칭.
8)통일교의 최초의 합동결혼의 124쌍.
9)통일교를 그만 둔 사람.
10)한국인 남편을 살해한 일본인여성신자로서 현재 복역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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