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K의 체험담
안녕하세요 지금부터 체험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통일교에 들어가게 된 동기는 1998년7월 당시 살고 있던 관서지방2)에서 청년의식조사라는 앙케이트에 대답했을 때부터 시작합니다. 비데오교육을 하고 있으니까 보러 오라는 권유를 받고 일단 거절했는데, 꼭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에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 후에 몇차례 연락이 있어 한 아파트의 방까지 안내되었습니다. 거기는 통일교회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나에게도 흥미있는 내용이기도 하고 소개자인 영적부모가 친절히 해주어 거절할 수 없어 비데오를 보거나 원리강론을 듣기 위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1999년 3월에 점을 보라는 권유를 받았는데 운세가 나쁘다는 말과 15만엔의 인감을 강요 받아 사고, 족보감정을 받았습니다. 이 길을 가지 않으면 33세에 죽는다는 말을 듣고 원한을 풀기위해 모든 저금을 헌금하라고 강요받았습니다. 나는 그 때 나의 모든 저금이었던 160만엔을 헌금하였습니다. 그 후에영적부모로부터 가정출발을 위해 나는 오오사까의 교회청년지부에 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오사까에서는 비데오센타의 상담원으로부터 아이비전에 가자는 말을 듣고 운세를 좋게 하기 위해 목거리를 사라고 강요당했습니다.나는 돈이 없다고 몇번이고 거절했습니다만 결국 돈을 빌려 106만엔에 목거리를 샀습니다. 1일수련회 2일수련회 신생트레이닝, 실천트레이닝을 거쳐 1999년 11월에 청년지부홈이 있는 연수센타에 들어갔습니다. 낮에는 회사에 가고 밤에는 매일 원리강론을 들으며 스케쥴이 철저히 관리되었습니다. 그 후에 3수련회도 참가하여 나는 통일교회에 점점 깊숙히 빠져들어갔습니다. 2000년 2월에는 4억쌍의 1차 축복에 참가했습니다. 한국의 서울스타디움에서 주체자와3) 처음 만났습니다. 나는 주체자를 받아들이가 어려워 취소를 하러 사무국에 갔습니다만 설득에 못 이겨 결국 승인을 했습니다. 입실한 후부터는 전도와 원리강의의 매일이었습니다. 회사와 신앙의 2중생활로 피로가 만성화하여 나는 심신의 피로와 아벨의 설득으로 2000년 6월 헌신을 결심했습니다. 헌신한 뒤부터는 전도기동대, 교육트레이닝반장, 마이크로4), 식사당번을 담당하며 약1년간 입거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청평수련회,치바에서 21일수련회등에 참가하고, 나의 신앙은 점점 굳어져 갔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주체자로부터 빨리 가정생활을 하고 싶다는 펙시밀리와 편지가 수 차례 있었고, 결국 2001년 9월 주체자가 홈을 방문했습니다. 올해안에 한국에 오지 않으면 축복을 파기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빨리 혼인신고도 끝내자고 하며 한국에 돌아가서는 나의 인감을 만들어 자신의 호적등본과 함께 두차례나 보내왔습니다. 주체자는 36만쌍의 축복때 한 차례 한일축복을 경험했었는데 그 일본인여성이 파기했기때문에 나와의 축복만은 어떻게든 성사시키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주체자의 강한 요망도 있고, 나는 혼인신고도 있어 한국에 서둘러 건너가느라 부모를 설득할 시간이 없어 동의 없이 호적을 빼어 2001년 12월 31일 한국에 왔습니다. 나는 정에 약하니까 호적을 뺄 때 부모에게 말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일본에서 사라지면 부모가 걱정할테니 한국에 건너가는 날에 편지가 도착하도록 하라는 지시도 있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통일교라는 것은 말 하지 말고 직장에서 알게 된 한국인과 결혼하고 싶어 한국에 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한국에 건너가기 직전까지 식사당번에 쫓겨 편지도 못 쓰고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가는 비행기안에서 나는 부모와 친구의 인연을 끊고 다시는 일본에 오는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은 한국밖에 없으리라는 기분이었습니다. 슬픔과 불안때문에 눈물이 나고 앞으로 어떠한 생활이 있을까하는 기대등 여러 생각이 뒤엉켜 있었습니다. 내가 한국에 와 소속한 교회는 일본인부인회장을 중심으로 많은 일본이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한국에 와 일본인식구수련회를 마치고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교회의 식사준비, 청소 한국말공부, 전도를 위한 축복팜플렛을 배부하며 주체자와도 가끔 만났습니다. 주체자는 조금 일본어를 할 줄 알았습니다만, 간단한 회화정도여서 중요한 말을 할 때는 언제나 부인회장이 통역을 해 주었습니다. 나는 주체자와 커뮤이케이션을 잘 할 수 없다는 것보다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언젠가 함께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더 큰 갈등이었습니다. 가능하다면 가정출발을 하지 않고 교회에서 생활할 수 있으면 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생각이 앞서는 자신은 아직 신앙이 부족하지 않나 하고 전도를 더욱 열심히 하기도 하고 기도도 하며 반성했습니다. 생활이 시작되어 1주일쯤 되었을 때 아직 편지를 받아 보지 못 한 가족이 연락이 되지 않는 나를 걱정하여 어머니와 언니가 교회를 찾아 왔다는 연락을 청년지부로부터 받았습니다. 나는 부인회장의 지시로 한국에 있으며 건강하다는 것만을 전화로 전했습니다. 그리고 2002년 2월초에 갑자기 아버지 언니 집안아저씨가 통역과 함께 나를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나는 부인회장의 지시로 한국에 와서 부모에게 편지를 보냈었는데 거기에 주체자의 집 주소를 적었기 때문에 있는 곳이 알려졌던 겁니다. 그러나 번지를 적지 않았기 때문에 찾기가 매우 힘들었을 겁니다. 통역이라고 속이고 온 분은 대한교회목사인데 알고 지내던 한국 크리스토교회 장로에게 부탁하여 겨우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통일교회 교구장과 부인회장의 지시에 따라 부인회장집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경찰에 수색요쳥을 하겠다고 하여 다음날 만나기로 했습니다. 나는 미리 준비한 대로 돌아 갈 때는 자신이 스스로 돌아가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와 언니의 대답의 태도에서 혹시 뒤에는 반대목사가 있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기는 좁혀지지 않고 2시간 이상 흘렀을 때 아버지가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교회가 지시한 대로 아버지를 밀치고 도망치듯 택시를 잡아 탔습니다. 택시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의 홈생활로부터 몇 년만에 부모와 만남이었습니다. 외국여행을 해본 일이 없던 아버지가 죽기살기로 자신을 찾아 한국까지 왔다는 기쁨, 그런 아버지가 야위어 작아 보였었습니다. 나를 데려가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는 마음과 또 그러한 아버지를 뿌리치지 않으면 안되는 아픔등 여러가지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인간적인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독려했습니다. 일본인 신자는 전도의 일환으로서 한국인에게 주 2번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또 당번제로 교회의 청소 점심준비, 보육, 행사의 협력등의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4월이 되어 교구장이 바뀌고 사모님을 중심으로 매일밤 11시부터 2시까지 철야기도회등 수련회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교구장이 새로 바뀔 때까지 1년간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가정출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교구장댁의 청소 세탁 장보기 식사준비 아이돌보기등이 맡겨졌습니다.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때로는 밤샘을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위에 매일밤 철야기도회도 있으니까 수면부족은 만성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주체자를 사랑하기위한 사랑의 훈련으로서의 수련이라는 말을 되뇌이며 매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나의 언니는 컴퓨터를 잘 다루는 주체자와 메일을 하며 나와 연락이 끊기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5월 중순경 언니가 나를 만나러 혼자서 오기도 하였습니다. 언니는 그 때 목사와 함께 왔었는데 그러한 낌새을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언니로서 동생을 걱정하고 있는 듯이 행동했습니다. 주체자와 둘이서 일시 귀국할 수 없는가를 물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 후 빨리 가정출발이 가능하도록 가정출발교육등을 받았습니다만, 주체자를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었는데 빨리 사단에 이기고 어떻게든 가정출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모님의 지시로 나와 주체자는 청평40일 수련회에 참가하였습니다. 그것을 거쳐 겨우 2002년 8월에 가정출발을 하였습니다. 주체자와 동거를 시작했어도 문화의 차와 언어의 벽이 높음을 느꼈습니다. 주체자와의 의사소통이 어렵고 간단한 일상회화만 가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 가정출발하고도 주체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나라인 한국인 남편을 갖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고 은혜로운 일인가, 또 우리 에바국인 일본인 식구는 아담국의 한국인 남편에 대해서 종으로서 다해야한다는 가르침을 언제나 념두에 두고 자신의 신앙의 미숙함을 반성하면서 주체자를 사랑하는 노력을 했습니다. 9월이 되어 1주일간 주체자와 함께 일본에 일시 귀국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언니의 메일이나 나를 만나러 왔을 때의 모습등에서는 뒤에 반대목사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못 했기에 통일교에서는 별로 경계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주체자를 이해 할 수 있도록 일본의 가족에게 만나게 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으로 일본에 돌아 돌아왔습니다. 일시귀국때 나의 친정은 주체자와 함께 식사, 장보기 관광등을 하며 친절하게 대응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언니가 통역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거나 통일교를 이해하기 위해 조금씩 공부하고 있다며 원리강론에 대해 자세한 부분까지 질문을 할 때는 혹시 반대목사가 뒤에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보다는 나자신 원리강론에 대해 의문이 생겼으나 대답을 못 하는 자신에 대해 화가나 대답할 수 있도록 되고 싶다는 생각이 더했습니다. 그 때의 일시귀국때에는 나와 주체자를 무리하게 잡아두려 하지 않고 한국에 돌아 가도록 해 주었습니다. 한국에 돌아 갈 때 어머니가 언제든지 돌아 오라며 울며 껴안아 주었을 때는 너무 좋았습니다. 한국에 올 때 두번 다시 일본에 오는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일본에 올 수 있고 언제든지 일본에 돌아 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합동결혼식도 보통의 결혼식도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아닌가 그러한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나는 오랫만에 가족의 따뜻함을 알고 기쁨을 느껴 이대로 일본에 남고 싶다는 생각과 돌아 가야한다는 생각에 잡혀 있었습니다. 한국에 돌아간 후에 다시 교회생활을 중심으로 한 주체자와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언니에게 받았던 질문에 대해 답을 찾으려 일본인 식구의 언니에게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언니는 통일교의 가르침은 원리강론에 그치지 않고 통일원리등 더 자세한 책도 있고 깊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납득이 갈 때까지 찾아보면 얼마나 통일교의 가르침이 좋은가를 다시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모두가 한국어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어렵고 또 날마다의 수련에 쫓기어 도저히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의 주체자는 공장에서 일하고 월평균7만엔의 수입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주 일을 그만 두고 집에 있거나 전직을 반복했습니다. 더구나 전근등도 있어 생활이 어렵고 언제나 절약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치과에 가고 싶었으나 금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일시귀국하여 1년후인 2003년 9월에 이를 치료하기 위해 교회로부터 혼자 귀국하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만일을 위해 통일교회 지부에 연락처를 알려주며 무슨일이 있으면 도망치도록 지시를 받았습니다. 나는 귀국했을 때 통일교에 대해서 좀더 공부하려 결심했었습니다. 거기서 치과를 다니며 가족모르게 몇번인가 지부에 연락을 하려 했습니다만 전화가 연결되지 않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중 나의 가족은 자신들이 공부해 온 것을 이해해주기 바란다며 한번 목사를 만나보자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심각한 얼굴로 평생한번의 부탁이라며 사정을 했습니다. 나는 그때 아버지가 진심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진심에 마음이 움직여 우선 통일교지부의 예배에 가면 만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부에 연락을 했습니다만 그때도 전화가 되지 않아, 나는 어쩔수 없이 목사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나는 속으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우물안의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종교도 알면 통일교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통일교의 훌륭함을 좀 더 깊이 알 수 있으리라 자신에게 이야기하며 목사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나는 통일교회의 잘 못 된점을 알게되고 지옥의 밑바닥까지 떨어 졌습니다. 일을 그만두고 친구와 연락을 끊고 자신의 의사마저도 죽여 가며 해온 일이 진리라고 믿어 왔고 앞으로도 일생을 걸고 지켜 내려 했던 일인가. 나는 슬픔과 억울함이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목사는 지금이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 탈퇴를 결심했습니다. 탈퇴의 결심을 하고 나서도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책을 읽거나 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마인드콘트롤에 걸려 있다는 것을 겨우 알았습니다. 통일교가 잘 못되었다는 것을 안 이상 통일교의 교의에 따른 축복이란 허위 결혼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혼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혼은 금방해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탈회로부터 2개월 뒤인 2003년 12월 말에 가족전원과 목사가 함께 이혼을 요구하기 위해 그 사람 집과 부모를 찾아 갔습니다. 한국크리스토교회 장로도 동행해 주셔 같이 설득해 주셨습니다.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이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체자는 내가 이혼의사를 말하자 쇼크를 받아 자살소동을 벌여 경찰을 부르는등 큰 소동이 일어 났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어머니의 집에 있는 것을 알고 안심했습니다. 귀국후 변호사를 소개받아 재판으로 해결하려 했으나 그 경우 부부로서 생활하지 않은 기간이 길면 길 수록 이길 수 있는 확률이 높다하여 바로 재판을 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그후에도 주체자로부터 메일로 이혼을 하려면 1000만엔을 지불하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만 물론 지불할 생각도 없었고,지불할 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몇차례 메일을 주고 받으며 나도 일본의 이혼신청서를 보내 이혼신청에 응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위자료금액도 내려가 아버지는 나의 장래를 생각해 위자료를 지불할 것을 고려하였습니다만 뒤를 이을 피해자들에게 전례가 되어서는 안 되다는 생각에 돈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혼 요청을 위해 한국에 간 뒤 2년이 지난 2006년 1월 17일 나와 언니는 서울에서 열린 일한통일원리문제포럼에 변호사, 목사와 참가했습니다. 포럼종료후 변호사, 목사와 함께 대구에 가서 장로님과 함께 다시 부모에게 위자료없이 이혼할 수 있도록 요청했습니다. 그 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 장로님을부터 한국의 변호사를 소개할테니 재판을 하면 어떻겠는가라는 조언이 있었습니다만 일본에서는 통일교회의 이혼소송에서 혼인무효등이 몇 건 인정되었습니다만, 통일교회의 위법성과 마인드콘틀롤의 이해가 적은 한국에서의 재판을 하여 잘 될지 걱정이 되고 한국에서 어떻게 재판을 해야하는가, 이길 수 있을까라는 불안으로 가족전원이 의기소침했었습니다. 탈회하여 5년이 지나 일본에서 재판을 검토하고 있을 그때 2008년 1월 주체자로부터 위자료없이 이혼하겠다는 메일이 있어 목사와 가족전원 6명이 한국에 갔습니다. 그리고 시청에서 주체자와 나는 이혼수속을 하여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주체자에게는 이전 같은 웃음이 없고 우리는 그저 사무적인 이혼수속을 끝마쳤습니다. 나는 주체자에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그 사람도 행복해지기를 마음속으로 바랬습니다. 누군가 나쁜 게 아니라 그 사람도 나도 통일교의 피해자이고 통일교의 비정함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그후 나라가 다른 이유로 일본측의 이혼수속이 순조롭지 못 해 나와 아버지는 몇번인가 한국총영사관에 가서 2008년 6월 겨우 끝났습니다. 나는 그 때 겨우 자유로이 되어 통일교로부터 떠났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태어난 상쾌한 기분이었습니다. 통일교에 관계하여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5년간은 통일교에 몰두하고 탈회하고도 마인드콘트롤의 후유증 이혼문제를 고민하면서 5년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통일교로부터 구출되어 지금은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나를 버리지 않고 전심전력으로 구출활동을 하신 부모 언니 그리고 목사님, 변호사님 또 정신적으로 지원해주신 탈회자 그리고 한국의 이국땅에서 엄청난 힘이 되어 주신 장로님등 여러분의 덕분이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이혼에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언어의 벽이 높았기 때문입니다.나의 경우 이장로님의 존재가 컸습니다.이장로님은 두다리가 불편한데에도 불구하고 내가 대구에 갈 때마다 동행해 주셨고 또 이혼에 진전이 없을 때에는 아버지가 써주신 편지를 전해 주기도 하고 그 사람의 부모를 설들하기 위해 몇번이고 방문해 주셨습니다. 이장로님의 도움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 있는 크리스토교회가 통일교의 위법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구출을 할 때 일본과 한국의 가교가 되어 주신다면 상당한 구출의 가능성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한국에 시집온 일본인 식구는 통일교회안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만일 한국의 크리스토교회에 통일교회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얼마나 마음든든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한국의 크리스토교회가 통일교의 위법성을 정확하고 깊게 이해하여 구출에 힘을 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나는 통일교회로부터 자유로이 된 현재 한국에 유학중입니다. 이번의 한국에서의 생활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서울명동을 걷고 있을 때 우연히도 연수센타에서 당시 반장을 하던 여성과 만났습니다. 그녀는 추운 밖에서 맛사지선전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온지 12년이 되고 아이가 3명 가계에 도움이 될까하여 선전지를 나누어 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또 어떤 섬에 갔을 때에는 소형트럭의 뒤에서 어묵과 붕어빵을 구워 팔고 있는 식구의 여성을 본 일이 있습니다. 40대 후반쯤의 여성이었는데 시집온 지 15년 화장기도 없이 세까맣게 탄 얼굴로 열심히 붕어빵을 굽고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영업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이 안타깝고 남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나도 혹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한국에 시집온 일본이 식구는 6000명이상이라 합니다. 그러한 그녀들을 직접보고 얼마나 일본인 식구들이 한국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고생하는가를 알고 마음이 아픕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통일교에 대해 울분을 느낍니다. 또 작년 일본인신자처의5) 사건을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나는 탈회하지 않고 한국에서 생활을 계속했다면 나도 어떻게 되었을 지 모릅니다. 박미유끼씨의 일을 생각하면 너무 불쌍합니다. 그녀가 하루라도 빨리 석방되어 가족이나 지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평안한 나날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이러한 기회가 주어져 문장을 작성하는데 있어 그때 그때의 장면과 심정이 선명히 생각나 울며 쓴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10년이 지나 통일교의 일은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지금도 마음의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습니다. 통일교회는 절묘한 수법으로 마인드콘트롤을 하고 사람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무서운 단체입니다. 그러한 통일교의 피해자를 한 사람이라도 많이 구출하기 위해서는 가족간의 연대감 주위의 절대적 협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한일축복의 경우 한국의 크리스토교회의 전면적인 뒷 받침과 협력이 열쇠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빨리 그러한 길이 열리기를 기원하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1)한국인남성 통일교신자와 일본인여성통일교신자부부의 호칭.
2)지명
3)합동결혼에 있어 신부로부터의 신랑에 대한 호칭.
4)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장사를 하는등의 경제활동의 약칭.
5)한국인 남편을 살해한 일본인여성신자로서 현재 복역중임.
|
|